신라 676년 ~ 935년
신라(新羅, 영어: Silla, 기원전 57년 ~ 935년)는 고구려, 백제와 함께 고대 한반도의 삼국 시대를 구성하였던 국가로, 세계적으로 오래 존속한 왕조들 중 하나로 꼽힌다.
진한에 소속된 소국 중 하나인 경주 지역의 사로국(斯盧國)이 그 시초이며, 박혁거세 거서간(干)이 나라를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왕(王)이라는 단어를 쓰기 전에 진한(辰韓)의 사로국에선 왕(王)또는 수장(首長)을 거서간, 마립간과 같이 간(干)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고 이사금이라는 호칭 또한 잠시 사용되었다. 또한 신라(新羅)라는 국호는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한다’라는 의미로 서기 503년 지증왕 때에 정해졌다.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국가의 틀을 갖추는 데는 가장 늦었다. 6세기경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백성의 단결을 꾀하였으며, 진흥왕 대에 이르러 전성기에 6세기중엽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대륙을 정복한 당나라와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또한, 당나라와 연합이 파기되고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대동강 이남으로부터, 원산만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3] 이로써 신라의 한반도 남부 통합이 이루어지게 되며, 이후 698년 발해가 건국되면서 발해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이루었다.
한반도 남부 통합 이후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고도의 중앙 집권 체계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 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 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섬세하고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들이 건축·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 왕과 귀족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내부 분열이 이는 와중에 지방에서 자리 잡고 있던 호족의 세력이 성장하여,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태봉을 세우면서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후삼국으로의 분열 및 부정부패의 만연 등으로 국력이 쇠락한 신라는 경순왕 때인 935년 고려에 스스로 복속하기로 하면서 56대 992년(사로국 포함) 만에 멸망했다.
진한(辰韓)과 신라에서는 왕(王)을 간(干)이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는데 신라 말기에도 충지 잡간(匝干), 아간(阿干) 처럼 간(干)이라는 호칭을 쓴 것을 알 수 있다.
== 출처 : 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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